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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정보와 지식

산업 시대에 사라진 예술가 그리고 예술가의 전략

by media9 2021. 11. 15.

 

 

산업 시대에 사라진 예술가

산업 시대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중에게 문화적 혜택을 준 것은 사 실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무질서와 혼돈도 있었다. 이런 혼란한 환경에서 소수의 지식인들은 참견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중은 반발하고 예술가들은 방황하였다.

 중세 시대의 문학도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 주의 소설이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공포와 로맨스를 다룬 고딕 소설로 이어지면서 예술의 상업화를 가속화했다.

 

 

"이제 예술은 본격적으로 시장에 거래되는 상품이 되었다."

이처럼 부르주아에 의한 예술이 상업화가 되자 기존의 작가(예술가)들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새롭고 독창적인 표현 방법을 시도하게 된다.

 

예술가의 전략

“산업 조건의 변화로 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던 트렌드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예술가들은 변화하는 세태에 빠른 적응이나 통합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영리한 예술가들은 살아남는 방법을 알았다. 한마디로 이들이 선택한 것은 창작이란 이름의 독창성 혹은 모호함이었다.”

19세기 이후 예술가의 후원자partron 체제가 쇠퇴하면서 예술이 경쟁 시장에서 도태되어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하자 기존의 예술가는 독창성과 혁신을 추구하며 살길을 모색하였다.

 

 

산업은 기계화되었지만, 예술가는 기계화된 작업으로 대량 생산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기계로 할 수 없는 독창성을 택한 거였다. 그 때문에 독특한 미적 개인주의가 생겼다는 말도 무리는 아니다. 「예술가들은 자기표현이라는 유리된 수단으로 창작 에 전력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부과된 의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경제적 권력의 추세에 영합하지 않기 위해 비교적 자주 그들의 고립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 다. (존 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이재언 옮김, 책세상, 2003, pp.27)」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도태라고 보일 뿐이다.

 

 

「중세는 모든 예술이 신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거대한 기독교 왕국이 건립되고 교황에게 복종하는 왕들은 이민족에 대항하기 위해 귀족들을 영주로 삼아 지역권한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중세 봉건제도의 시작이다. 중세는 철저한 계급 사회로 최고 계급이 성직자, 그 다음이 기사였고, 나머지는 모두 농노였다. 중세 시대도 교회를 벗어나 자생적으로 피어난 예술이 있었다. 수도원을 도망친 신부, 수도사, 학자들이 떠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들을 음유시인이라 했다. 음유시인들의 이야기는 주로 영주의 소규모 궁정에서 일어나는 연애 이야기로서 이를 기사문학이라고 한다. 기사문학의 특징은 신보다 인간 특히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장 한다는 점이다. 음유 시인의 등장으로 기사문학이 발전하였고, 교회가 아닌 개인의 용기, 충 성심, 미, 용서 등이 예술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12세기 십자군 기사들의 사랑과 모험을 담은 노래가 자생적인 유랑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이후 대규모 공연이 대중예술로 변화하면서 예술의 상업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역의 발전으로 도시계급이 대두하고 문화의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세속적 주제가 시민계급이 즐기는 예술로 발전해간다. 이렇듯 중세 말기 문화의 세속화로 예술가들이 도시에 모여들었고 예술 공방인 길드 (guild) 가 탄생하여 예술가들끼리 경쟁하였다. 길드의 탄생은 이후 르네상스를 이끌게 될 뛰어난 예술가들을 육성 하는 역할을 했다...중략...

 

 

...르네상스 운동은 14~16세기의 문예 부흥운동이다.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한 이 시기의 문 화예술이 비록 교회와 궁정 그리고 귀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메디치 가문 등의 후원을 받아 생성) 도시 부르주아지들의 등장으로 교회나 왕 또는 귀족과 함께 시민 계급의 예술 후원자(art partron)이 등장하였고 예술에 대한 관심을 대중화하였으며 상업 예술이 시작되었다. 」 <정철현, 『문화정책』, 서울경제경영, 2015, pp.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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