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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정보와 지식

위대한 여성 록스타 패티 스미스 뮤직 스토리

by media9 2021. 8. 22.

국내 가수 중 외형이 요조와 좀 흡사하다고 생각되는 패티 스미스의 뮤직 스토리

 

미국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패티 스미스(Patricia Lee Smith)는 1946년 12월 30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75년 데뷔 앨범 'horses' 발매하면서 유명해졌다. 앨범 발매 이전에도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유명했는데 주로 시인들과 뉴욕에서 어울렸다.  그녀는 랭보등 초현실주의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펑크 뮤직에 시적인 가사를 인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결혼 후에는 육아에 전념하다 미망인이 된 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포토그래퍼 놀이를 했다. 

패티 스미스의 어린 시절

 

패티 스미스의 엄마는 재즈 싱어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발전소 직원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뉴저지의 우드버리에서 보냈다. 그녀의 엄마 비버리 스미스는 여호와의 증인 광신도로 패티에게 자신의 종교를 주입시키는데 열을 올렸다. 그때문에 패티는 십대 시절에 종교를 거부하고 벗어난다. 이러한 경험을 'Gloria'에 담았다.

가사 중: 'Jesus died for somebodys sins but not mine: 예수는 내 죄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죄를 위해 죽었다네., 

 

어릴적부터 랭보의 시, 짐 모리슨이나 롤링 스톤의 음악에 푹빠져 지내던 패티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뉴저지에서 뉴욕이 멀지도 않은 거리이긴 하지만….

뉴욕에서 연극 시나리오 및 시를 쓰는 작가 놀이를 하던 중 기타리스트 레니 케이를 만나면서 케이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자신의 시를 낭송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음악가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그녀는 몇 년동안 록 전문지 creem에 글을 기고하면서 록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new york dolls의 오프닝 무대에 선다. 뉴욕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록과 랭보 공연을 계기로 레니 케이와 함께 리차드 솔이 가세하면서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패티가 데뷔한 시기는 히피들의 포크락이 시들해질 무렵 뉴욕 언더그라운드 클럽에는 실험적인 음악들에 합류했다. 그것이 바로 텔레비전과 레이먼즈 등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한 펑크 록이었다. 패티 스미스는 여성들이 전무한 가운데 홀로 분투하여 펑크의 대모라는 칭호와 함께 70년대의 특별한 뮤지스트로 급부상한다.

 

 

 

1974년 결성된 이 그룹은 ‘piss factory’라는 첫 싱글을 발표하였고 이후 블론디 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반 크랠을 영입하여  4인조로 거듭난다. 앞에 서술한 cbgb 클럽의 고정 멤버로 활약하면서 왕성한 라이브 활동을 펼친다.

1975년 그룹은 공식적이고 역사적인 첫 앨범 ‘horses’를 발표한다.

 

 

이 곡은 펑크 록은 물론 록 전체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소위 상징주의로 표현되는 모호하고 즉흥적인 노랫말, 강렬하지만 세련된 짜임새를 가진 사운드는 당시 어설픈 펑크 락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적 면모가 엿보이는 데 새 길을 열었다. 그것이 바로 엄마가 종교적 압박을 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룹의 두 번째 앨범 ‘radio ethiopia’로 돌아온 그녀는 투어 도중 무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잠시 공백기를 가진 후 1978년 앨범 ‘easter’를 발표하여 대중에게 확실한 사랑을 받는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곡도 함께 쓰고 유럽 투어 등을 나서며 왕성할 활동을 하지만 스타덤에 대한 회의감과 프로토 펑크 그룹 mc5출신 기타리스트 프레드 스미스와 연애를 하면서 새로운 삶을 갈구하게 되고 활동 중단을 결심하게 된다. 보통 남자들은 사랑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데 여성 로커라서 그런가? 하는 편견을 아니 가질 수 없게 만든 에피소드이다.

 

 

그녀는 1979년 ‘wave’ 앨범을 마지막으로 7만명 관중 앞에서 bye bye hey hey를 외치며 은퇴하였다. 

 

1980년 프레드와 결혼한 스미스는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고 한동안은 두 아이를 양육하며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다. 행복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 두 부부의 앨범이 1988년 ‘dream of life’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은퇴는 왜 선언한건지. 

 

 

그러나 패티 스미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남편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했고 한 달 뒤에는 동생마저 심장마비로 죽었고 오랜 친구 메이플 소프와 옛 동료인 솔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정도면 그녀의 엄마가 맹신한 여호와의 증인의 저주가 아닐런지. 아니면 루시퍼의 급 소환이거나.

절망 속에서 헤어날 길이 없던 패티 스미스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무대에 다시 서야겠다고 결심하고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다.

 

이쯤되면 정말로 루시퍼의 소환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패티 스미스는 1996년 6번째 앨범 ‘gone again’으로 완벽하게 돌아왔다. 

 

 

1997년에는 ‘Peace and noise’ 앨범을, 2000년에는 ‘gung ho’를 발표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다. Gung ho가 무슨 사람이름인가 했더니, 매우 열정적이거나 흥분될 때를 뜻하는 단어였다.

 

 

 

펑크 장르와 여성 뮤지스트란 특별한 포지션으로 문학과 음악의 조화를 이루며 감각적인 가사와 중성적이고 강렬한 외모로 tree chord rock merged the power of words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언어의 힘을 융합한 3코드록이라나. 이후 패티 스미스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여성 로커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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