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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정보와 지식

비틀즈의 뮤직 스토리

by media9 2021. 7. 30.

1954  미국의 지역 방송국 대중 음악 프로 DJ로 명성이 높던 알란 프리드는 새로운 형식의 특정한 노래들에 대해 로큰롤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용어는 1955년에 빌 할리의 영화 'rock around the clock' 의 사운드 트랙과 척 배리의 'roll over beethover' 등 몇몇 가수들의 노래를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56년 등장한 엘비스 프레슬리와 1957년에 데뷔한 폴 앵카 등 신인들이 가세하여 로큰롤이란 용어를 세계적으로 알리며 정착시켰다.

 

1957년 척 베리가 발표한 'rock & roll'은 대놓고 제목부터 로큰롤이라고 지어 큰 인기를 얻는다. 이후 어떤 형태의 노래가 로큰롤인지 대중은 명확하게 인지했다. 

경쾌한 리듬에 록비트가 가미되어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초기의 로큰롤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이무렵 비틀즈는 아직 십대의 청소년에 불과했으나 1956년 척 베리의 노래에 심취해 있던 존 레논은 아마추어 밴드 쿼리맨을 결성에 학교에서 이름 꽤나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중순경 동네 교회에서 공연 중 폴 매카트니를 만난다.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밴드에 영입시키며 그룹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조지 해리슨이 들어오고 MOONDUST로 이름을 바꾸어 ABC 방송국 오디션에 통과한다. 통과하고 나니 이름이 거슬렸던지 실버 비틀즈로 개명한 뒤 함부르크 순회 공연에 나선다. 그러나 공연이 피곤했던지 멤버들이 탈퇴하고 하려던 앨범 녹음 작업도 무산되고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 해체가 되는 듯싶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룹 로리스톰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던 링고스타를 영입하고 실버를 뺀 비틀즈란 이름으로 완전체가 결성된다. 이들은 데뷔곡 'love me do'를 발표하였고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가 1963년 2월 차트를 석권하면서 미진했던 1집 앨범까지 소환되어 6개월동안 1위레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들은 보다 더 성장하고 세련돼졌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로큰롤을 근간으로 다양한 음악 장르를 섭렵하였다. 그렇게 영국식 로큰롤이 완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멤버 하나하나가 뮤지스트로서 나무랄 데 없는 능력을 지닌 비틀즈는 1975년 해체되기 전까지 새로운 업적을 쌓으며 신화를 창조해나갔다.

 

 

본격적으로 1964년부터 미국에서 돌풍적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는데 엘비스 프레슬리의 솔로 기반의 로큰롤에 식상함을 느낀 터에 비틀즈의 신선한 외모와 스타일 그리고 노래는 미국 입장에서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으레 뮤지스트들이 그렇듯 어떤 정점에 이르렀을 때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면서 발전하려고 하는데 각각 능력이 출중하던 이들도 결국에는 서로의 개성이 강해서 화합하지 못했다.

 

 

1968년 비틀즈는 레코드 회사를 직접 차리고 이름을 애플 에이전시라고 짓는다. 그러나 역시 전문 영역은 따로 있는지 개별 활동만 하다 1970년에 폴 매카트니는 이익 배당을 요구하며 세 사람에게 소송을 제기하고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1962년에 love me do 를 출발해서  <let it be>, <long and winding road>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고 브리티쉬 록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이들은 해체된다. 그리고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맨해튼 자택 근처에서 정신 질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지금도 뉴욕 센트럴 파크 안에는 존 레논을 추모하는 장소가 있다. 그리고 존 레논 1주기에 세 명이 모여 ALL THOSE YEARS AGO를 공동 제작하여 존 레논에게 헌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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